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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사랑하는 자는 빨리 데리고 가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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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2020-02-03

76. 사랑하는 자는 빨리 데리고 가신다

  요시야의 종교개혁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래서 신명기 사가는 요시야를 이렇게 평하고 있다.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향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요시야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왕하23:25).

  외경 집회서도 “다윗과 히스기야와 요시야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악행만을 자행하였다”(49:4)고 한다. 정경과 외경 모두 요시야에게 후한 점수를 주고 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너무나 허무했다. 요시야를 죽음으로 몰아 넣었던 당시 상황은 이렇다. 기원전 7세기 말엽인 609년에 북왕국을 폐망시켰던 앗시리아는 국력이 쇠하면서 신바벨론 제국에 의해 멸망당하고, 하란에 망명 정부를 세우고 마지막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가장 긴장한 것이 남쪽의 이집트 제국이었다.
  앗시리아가 바벨론에 망한 이상,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근동 지역의 패권은 바벨론에게 돌아갈 수 밖에 없다. 지금까지는 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 앗시리아, 바벨론,  이집트의 세력이 균형을 이루었으나, 이제는 힘의 균형이 바벨론으로 쏠리게 된다. 그러면 이집트의 안보도 불안하게 된다. 이 사실을 간파한 사람이 이집트의 바로 느고(Neco) 2세였다. 느고는 부왕 프사메티쿠스의 뒤를 이어 왕위에 즉위함과 동시에 바벨론으로부터 앗시리아의 영토를 탈환하고, 하란에 자리하고 있는 앗시리아의 앗수르우발릿(Asshuruballit) 망명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출병했다.  근동 지역의 황금의 삼각 균형을 유지코자 하는 계획의 일환이었다. 
  느고는 대군을 이끌고 유프라테스 강변의 갈그미스(Carchemish)로 진격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집트에서 출병한 군대가 갈그미스로 진격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의 군사 요충지인 므깃도를 통과해야만 한다.
  한편 당시 근동 세계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던 사람이 유다의 요시야왕이었다. 만일 이집트가 갈그미스 전투에서 바벨론에게 승리한다면 유다는 이집트의 간섭과 지배를 받아야 되는 상황이 올 것으로 예상했다. 이런 상황을 원치 않았던 요시야는 갈그미스로 진격하는 이집트 군대를 므깃도에서 저지하기로 했다. 므깃도에서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난 만난 느고는 요시야를 설득했다.

       유다의 왕은 들으시오. 왕은 왜 나의 일에 관여하려고 하오. 나는 오늘 왕을 치려고 
       온 것이 아니라 나와 싸움이 벌어진 족속을 치려고 나선 것이오. 하나님께서 속히 가
       라고 명하셨다. 그러니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오. 하나님을 거역하는 이 일을 어서 
       멈추시오(대하35:21).

  느고는 자신의 출병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 그러면 요시야는 왜 하나님의 뜻을 거역했을까? 요시야는 우상숭배자인 느고의 말을 진솔하게 받아 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요시야는 므깃도 전투에서 적군의 화살에 맞아 죽었고, 느고의 군대도 역시 갈그미스 전투에서 바벨론에게 패하고 말았다. 아마 므깃도에서 유다와의 전쟁으로 전력 손실을 입은 것이 패배의 큰 원인이었을 것이다.
  요시야는 위대한 왕이었지만 39세라는 젊은 나이에 불필요하게 느껴졌던 전쟁에서 죽고 말았다. 남의 나라 전쟁에 끼어 들었다가 허무하게 죽은 셈이다. 예레미야는 애가를 지어 요시야의 죽음을 슬퍼했고, 온 백성들은 통곡했다(대하35:25).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학적인 회의감에 빠졌다. 왜 위대한 왕을 하나님은 그렇게 허무하게 죽게 했고, 또한 일찍 데리고 가셨느냐는 것이다. 사실 이 신학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외경 『지혜서』에서 찾을 수 있다. 

      젊은 세월 동안 완성에 도달한 것은 오래 산 것과 다름이 없다. 그의 역할이 주님의 뜻에
      맞았기 때문에 주님은 그를 악의 소굴에서 미리 빼신 것이다(4:13).

      일찍 죽은 의인이 살아 남은 악인들을 단죄하며 젊은 나이에 죽은 의인이 오래 산 악인
      을 부끄럽게 만든다. 사람들은 현명한 사람이 죽는 것을 보고도 그에 대한 주님의 계획
      을 깨닫지 못하고 주님이 그를 안전한 곳으로 데리고 간 이유를 모른다(4:16-17).

  물론 개신교는 지혜서를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지만, 히브리어 성서를 헬라어로 번역했던『70인역 성서』(Septuagint)와 오늘의 카톨릭 교회에서는 분명히 정경으로 읽고 있다. 그러므로 무조건 외경이라고 무시할 수도 없는 일인 것이다. 
  지혜서에 의하면 요시야는 짧은 세월을 살았지만 완성에 도달할만큼 빛나는 업적을 쌓았고, 어떤 장수한 사람보다도 훌륭한 일을 했다. 따라서 하나님도 그를 무척 사랑하셨다.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악의 소굴인 세상에서 추함을 목격하고 고통을 겪기 전에 일찍 데려 가신 것이다. 이제 요시야의 죽음에 대한 해답은 나왔다고 본다. 하나님의 일을 완성했던 요시야는 앞으로 소용돌이 치게 될 근동의 역사를 경험해야 한다. 더 있어 보아야 괴로움과 고통만 더할 뿐이기에 일찍 데리고 가신 것이다. 
  우리 주위에는 때때로 정직한 사람, 아름답고 믿음으로 살아 온 사람들이 젊은 나이에 갑자기 죽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 왜?”라고 질문한다. 이럴 경우에 요시야 죽음에 대한 해답을 적용시켜 보는 것이 어떨까? 슬픔과 아픔을 당한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와 소망이 되지 않을까?
  그리고 한 가지를 기억하자. 오래 살기를 원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할 일이 다 끝났다는 말을 하지 말자. 하나님의 일을 완성하면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고통과 슬픔이 없는 하나님 나라로 데리고 가신다고 했기 때문이다. 죽을때까지 할 일이 남았다며 열심을 다하자. 그것이 장수하는 비결이라고 지혜서는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