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북이스라엘의 멸망사
목록 가기
날짜 : 2020-02-03
74. 북이스라엘의 멸망사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라는 훌륭한 왕의 통치하에서 40년간의 태평성대를 누렸다. 그러나 여로보암 2세가 죽은 후, 25년도 안되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는 비운을 겪었는데, 특히 여로보암의 사후 10년 동안에는 무려 다섯 명의 왕들이 바뀌었다. 그 중에 세 명은 쿠테타로 왕위를 찬탈한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인 혼란은 나라를 패망의 수렁으로 몰아 넣었다. 한편 하나님은 북이스라엘의 멸망사를 통해서 분명한 신학적인 메시지를 주고 있는데, 이제 그 패망의 과정과 메시지를 들어보자. 여로보암 2세가 죽은 후, 그의 아들 스가랴가 6개월 집권 후 살룸에 의해 암살되었고, 살룸은 한달 후에 므나헴에게 피살되었다. 므나헴은 앗시리아에 조공을 바치며 권좌를 유지했으나, 그의 아들 브가야는 반앗시리아 깃발을 든 군대 장교 베가에게 암살되고 왕권도 베가에게 넘어갔다. 앗시리아와의 주전론자의 대표였던 베가는 다메섹왕 르신과 동맹을 맺은 후, 남유다의 아하스 왕에게도 동참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아하스가 이를 거부하자 베가와 르신의 동맹군이 예루살렘을 공격하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시리아-에브라임 전쟁이다. 다급해진 아하스는 앗시리아에 원병을 청했고, 앗시리아의 디글랏빌레셀은 시리아로 진격하여 르신을 처형하고 그 영토를 자신의 속국으로 만들었다. 한편 이스라엘에서도 베가가 호세아에 의해 암살되고 왕권을 장악한 호세아가 앗시리아에 조공을 바치면서 간신히 국가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호세아는 앗시리아의 디글랏빌레셀이 죽자마자 친이집트 정책으로 돌변하면서 조공을 끊고 말았다. 분노한 디글랏빌레셀의 아들 살만에셀 5세는 북이스라엘을 침공하였다. 호세아는 이집트에 지원군을 요청하였으나 이미 국력이 쇠약해진 이집트는 남을 도와줄 수 있는 힘을 상실한 상태였다. 결국 호세아는 앗시리아에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고, 사마리아 성은 2년 이상 버티다가 살만에셀의 후계자인 사르곤 2세에 의해 기원전 722년에 완전히 망하고 말았다. 북이스라엘이 왜 망했을까? 우리는 여기서 신학적인 메시지를 찾을 수 있다. 우선 북이스라엘은 출발이 잘못된 나라이다. 북왕국의 창건자인 여로보암은 북왕국 백성들이 남왕국의 예루살렘 성전제의에 참여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즉 예루살렘으로의 순례가 계속된다면 국가의 정체성과 왕정의 붕괴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젖어 있었다. 그래서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놓고, 이 신이 우리를 이집트에서 해방시킨 야웨 하나님이라고 선전했다(왕상12:28). 이처럼 북왕국은 우상의 터위에 건국된 나라이기에 멸망은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로, 사회적인 부패를 들 수 있다. 아모스서를 보면 북왕국의 빈부격차는 극에 달하고 있다. 입에 풀칠이나 하며 살았던 일반 서민들의 운명은 고리대금업자들의 손에 달렸다. 재판관들은 돈에 매수되어 언제나 가진 자들의 손을 들어 주었고, 부자들도 가짜 도량형기를 만들어 서민의 재산을 탈취했으며, 재산을 갈취당한 서민들은 노예로 전락했다. 그러나 부자들은 여름별장, 겨울별장을 지어 놓고 살았으며, 송아지 고기를 먹고, 상아침대에 누워 잠을 자는 초호화판 생활을 했다. 셋째로, 종교적인 부패이다. 사마리아의 수기용 토기편들에 적혀 있는 이름을 보면, “야웨”라는 이름과 “바알”이라는 이름의 수가 거의 같게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야웨와 가나안 원주민들의 주신인 바알이 혼합되어 있다는 증거이다. 그래서 선지자 호세아는 북왕국 백성들을 향해 “너희들은 바알을 섬기듯이 야웨를 섬기고 있다”며 비판했던 것이다(호2:16). 결론적으로 북왕국은 우상을 기초로 건국되었고, 사회적으로 부정과 불의가 난무했으며, 종교적으로도 야웨의 순수 신앙은 사라지고 혼합적이고 기형적인 종교로 변질되었다. 이것이 북이스라엘을 역사의 무대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한 요인이다. 남북한 간의 긴장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는 우리의 미래도 북이스라엘의 멸망사를 보면서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