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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개혁만이 살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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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2020-02-03

75. 개혁만이 살 길이다

  남북 왕국을 통틀어 가장 오래 통치한 왕은 남왕국의 므낫세이다. 그는 55년 동안 장기 집권하면서 부왕인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을 무위로 돌렸고, 이방 제의와 종교적인 매음행위를 공공연하게 방치했으며, 야만적인 인신제사를 도입했다. 신명기 사가는 므낫세가 “죄없는 사람을 너무 많이 죽여서 예루살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죽은 자들의 피로 흠뻑 젖었다”고 보도하고 있다. 위경인 “이사야 승천기”(Ascension of Isaiah)에 실린 전설에 의하면, 이사야는 므낫세에 의해 톱으로 두 동강이 잘려서 죽었다고 한다. 포악하고 잔인했던 므낫세로 인해 야웨 종교가 위기로 내몰리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므낫세가 죽자 그의 아들인 아몬이 즉위했으나 2년 만에 왕족들에 의해 암살되고, 당시 여덟 살이던 요시야가 왕위에 옹립되었다. 요시야의 등극은 침체의 늪에 빠졌던 이스라엘에 희망의 불씨를 제공했다. 학자들은 요시야를 다윗 이래 가장 훌륭한 임금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의 진가는 “오직 개혁만이 살 길이라”며  개혁을 국정 최고의 지표로 삼았다는데 있다. 그러면 어떤 동기에서 요시야는 개혁의 횃불을 들었을까?
  우선 요시야의 개혁은 성전 수리 중에 율법책이 발견됨으로써 더욱 가속도가 붙었다(왕하22:1-7). 요시야는 발견한 율법책을 서기관 사반이 낭독하자 통곡하며 옷을 찢고 회개했다(왕하22:8-13). 이 율법책에 도대체 어떤 내용이 수록되었기에 요시야가 경악했을까? 구약성서 학자들은 이 율법책이 신명기라는데 동의하고 있다. 물론 지금의 신명기와는 조금 다른 전승의 신명기이지만 말이다. 왜 신명기가 요시야로 하여금 옷을 찢게 만들고, 종교개혁의 고삐를 당기게 했을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 이래로 안이한 안보관, 즉 거짓 안보관에 스스로 속아 오고 있었다. 다윗과 계약을 맺으신 하나님은 다윗에게 “너의 나라와 너의 위를 영원히 보존해 주시겠다”(삼하7:16)고 약속하셨다. 이러한 다윗계약은 백성들로 하여금 타락의 현장에서도 막연하게 하나님의 보호를 확신케 만들었다.
  이런 거짓 안보관에 안주하는 양상이 요시야 시대에도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신명기서가 발견되었다. 그러면 신명기의 주제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나가도 들어가도 복을 받는다. 그러나 불순종하면 나가도 들어가도 저주를 받는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즉 요시야는 발견된 신명기서를 통해서 하나님은 무조건 이스라엘의 안보를 책임져 주시는 분이 아니라, 순종할 때에만 국가를 보위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동안 왕과 백성들이 거짓 예언자들에게 속아 200년 이상 거짓 안보관에 속아 안주했던 것이다. 거기에 대한 자신의 어리석음과 회개가 요시야의 옷을 찢는 통곡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지금까지의 어리석음과 왜곡된 신앙을 바로 잡기 위해 요시야는 개혁의 기치를 더욱 높이게 되었다.
  한편 요시야의 종교개혁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제의장소의 단일화”를 들 수 있다. 그동안 제의는 예루살렘 뿐만 아니라, 각 지방의 성소와 산당에서도 드려졌다. 이것이 결과적으로 신학적인 왜곡과 이방 종교와의 혼합을 가져오는 폐단이 된 것이다. 그래서 요시야는 지방의 모든 성소와 산당을 폐쇄하고 제사장들은 예루살렘으로 불러 올렸다. 순수한 야웨 종교를 지키기 위한 방편이었다.
  다음으로는 성대한 유월절 행사였다(대하35:1-19). 이 유월절은 남북이 하나되어 사무엘 이래로 가장 성대하게 치러졌다. 행사의 목적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기억하고 우상을 버리고 감사하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공교롭게도 지금 우리나라는 새로운 대통령 당선자가 출현하면서 미래의 변화에 대한 욕구와 기대로 한껏 부풀어 있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핵문제를 들고 나오면서 국내외 매스컴의 헤드 라인을 장식하고 있다. 북한이 핵을 개발한다고 하는데도 당사자인 우리의 태평스러움은 외국인들을 놀라게 하고 있다고 한다. 많은 국민들이 설마 북한이 핵을 우리한테 사용하겠느냐, 무엇인가 미국에 더 얻어 낼려는 술책이겠지라고 막연한 안정감에 젖어 있다. 
  혹시 요시야가 지금 우리나라에 있다면 어떻게 할까? 또 다시 안이한 거짓 안보관에 속은 것을 후회하며, 옷을 찢고 통곡하지는 않을까? 이런 상황을 직시하면서 “개혁만이 살 길이라”며 앞장 섰던 요시야의 신앙과 삶을 우리는 여기서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