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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가장 위대한 왕에 대한 최악의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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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2020-02-03

73. 가장 위대한 왕에 대한 최악의 평가

  구약신학자 허버트 돈너(H. Donner)는 북왕국의 열왕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왕은 아합왕의 아버지인 “오므리”(Omri)라고 말했다. 돈너의 말은 역사적으로도 증명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성서는 오므리의 훌륭한 업적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그에 관한 기록도 아주 짧은 대신, 가장 악한 왕으로 소개하고 있다. 따라서 성서만을 읽는 독자들은 오므리는 그저 무능하고 세월만 보내다가 간 악한 왕으로 생각하기 쉽다. 오므리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서 이외의 역사 자료들을 살펴 보아야 한다. 이것은 북왕국의 가장 위대한 왕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첫째로, 열왕기상 16장에 소개되어 있는 오므리의 왕위 쟁탈사를 보자. 바아사라는 인물이 북왕국의 창건자인 여로보암 왕조를 무너뜨리고 그의 집안을 몰살하고 왕이 되었다. 그러나 바아사는 자연사하고 그의 아들 엘라가 왕위를 계승했으나 역시 얼마 가지 않아 연회장에서 그의 병거대장 시므리에 의해 암살되었다. 시므리도 역시 바아사 집안의 모든 식솔들을 숙청하였다. 이때 이스라엘 병사들은 깁브돈에서 블레셋과 전쟁 중에 이 소식을 들었다. 즉 블레셋과 전쟁 중이던 군사들은 시므리의 쿠테타 소식을 접하고, 그들의 군사령관인 오므리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오므리는 즉시 시므리가 거주하고 있던 디르사 성을 포위하자, 절망적인 상황임을 감지한 시므리가 스스로 불속에 들어가서 목숨을 끊었다. 시므리가 죽음으로써 잠시나마 이스라엘은 왕의 공백상태가 되었다. 왜냐하면 오므리가 예언자 집단의 지지를 받지 못하자 백성들이 디브니를 새로운 왕으로 옹립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즉 백성들의 절반은 오므리를 지지하고, 절반은 디브니를 지지하는 정치적인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군사력에서 강했던 오므리의 지지 세력들이 디브니를 살해함으로써 오므리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둘째로, 오므리의 정책을 보자. 북왕국의 초대 왕이었던 여로보암의 정책은 한 마디로 폐쇄정책이었다. 대표적으로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놓고 백성들이 예루살렘 제의에 참여하는 길을 원천적으로 막았다. 이것은 개방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러나 국제적인 감각이 뛰어났던 오므리는 개방정책을 펼침으로 국제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 되었다. 사실 오므리의 시대는 불안정하고 위험한 요소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즉 북쪽으로는 앗시리아의 팽창과 다메섹의 위협이 있었고, 남쪽으로는 블레셋의 급증한 위험이 계속되고 있었다. 
  국내적으로도 계속되는 쿠테타로 인해 또 다른 쿠테타를 경계해야 되는 불안정의 연속이어고, 이로 인한 왕권의 권위상실과 모래알처럼 된 백성들의 흩어진 마음을 하나로 통합하는 일도 급선무였다. 이것들은 오므리가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이 시급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므리가 택한 정책은 외국과의 관계개선이었다. 그래서 그는 주위의 나라들과 사돈 관계를 맺는 정략결혼 정책을 추지하게 되었다. 두로 왕의 딸인 이세벨을 자신의 아들 아합과 결혼시킨 사건이 그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오므리는 내부 결속을 위해서 수용적인 종교정책을 추진했다. 원주민이든, 이스라엘 백성이든 어떤 종교, 어떤 신을 섬겨도 배척하지 않고 묵인 내지는 용인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라도 상호 마찰과 분쟁을 줄여서 평화를 유지하려던 발상이었다. 
  어쨓튼 오므리의 통치시대는 다윗 시대에 견줄만큼 경제, 군사, 정치적으로 부강하고 평온한 시대였다. 그래서 학자들은 북왕국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왕으로 오므리를 선택하는데 주저하지 않는 것이다.
  셋째로, 오므리에 대한 평가를 보자. 오므리에 대한 평가는 정치적인 면과 종교적인 면으로 나누어 진다. 우선 전자의 경우, 블렉 오벨리스크(black obelisk)에는 앗시리아의 살만에셀 3세(Shalmaneser Ⅲ)가 “오므리의 아들 예후에게 조공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위대한 왕의 아들로부터 조공을 받았다는 것을 자랑하기 위한 기록이다. 그리고 앗시리아의 역사서문에는 이스라엘을 “오므리의 집”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오므리가 북왕국에서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또한 모압의 비문에는 오므리가 모압을 오랫동안 지배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정치적인 면에서는 국내적으로나 국제적으로 훌륭한 평가를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오므리에 대한 성서 기자의 평가는 아주 냉혹하다. “오므리가 악을 행하여 그 전의 모든 사람들보다 더욱 악을 행했다”(왕상16:25)고 한다. 왜 신명기 기자(사무엘서, 열왕기서의 저자)는 오므리의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업적은 모조리 생략한채, 그 전의 어떤 왕들 보다 악했다고 평가하고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신명기 사가의 신학적인 배경을 관찰해 보아야 한다. 신명기 사가의 역사 평가 기준은 야웨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최우선이다. 아무리 국내적, 국제적으로 뛰어난 업적을 쌓았더라도 하나님과의 신앙적인 관계가 바르지 못하면 “저가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길로 갔다”는 지극히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즉 신명기 사가의 눈에는 오므리의 신앙심 외에는 어떤 것도 관심과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던 셈이다. 
  오므리는 국제적인 긴장을 해소하고 평화를 추구한다는 미명 아래 주위 나라들과 정략결혼으로 사돈관계를 맺었고, 국내적으로도 소요 진정책으로 모든 종교들을 용납하고 우상 숭배를 방조하였다. 이런 인간적인 정책들이 신명기 사가에게는 분통터지는 일이고, 악의 전형으로 비쳐졌던 것이다. 따라서 오므리의 화려하고 위대한 업적은 역사 속에 묻힌채, 신명기 사가의 집중적인 공격으로 그는 악한 왕들의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이다.
  오므리의 이야기는 아무리 인간이 위대하고 능력있는 삶을 살았어도, 하나님과의 신앙적인 관계가 올바르지 못했다면 그것은 실패한 인생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신명기 사가는 현대인들에게 이런 분명한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