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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축복의 땅인가? 저주의 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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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2020-02-03

56. 축복의 땅인가? 저주의 땅인가?

  구약성서에서 “가나안”이라고 묘사된 땅은 오늘에 와서는 “팔레스타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운다. 현재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은 역사적으로 보면 그들의 철천지 원수였던 블레셋(Philistines)이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역사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그리이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기원전 5세기에 이곳을 “팔라이스티나”(Palaistina)라고 명명했다. 그리이스어 팔라이스티나는 라틴어를 거쳐 영어로 오면서 팔레스타인(Palestain)이라는 말로 고정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한편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의 선조들이 약속받았던 가나안 땅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모습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구약성서가 보도하고 있는 가나안은 이런 양면성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우선 긍정적인 면에서 가나안은 축복의 땅이다. 하나님은 상부 메소포타미아인 하란에 거주하던 아브라함을 불러 가나안으로 인도하셨다. 그때 하나님은 가나안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였다. 물론 가나안은 지중해변을 중심으로 펼쳐져 있는 해안 평야지대를 제외하면 대부분 중앙 산악지대와 고원지대로 사람이 살기에 좋은 환경은 아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록 척박한 땅이지만 그들의 하나님 야웨가 주신 땅이기에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축복의 땅”이라며 감격해 했다. 열 두 사람의 정탐군들이 “가나안 땅에는 포도 한 송이를 두 사람이 어깨에 메고 나르는 곳이라”(민13:23)는 보고는 백성들의 가슴을 벅차게 만들기도 했다.
  이집트의 430년에 걸친 노예생활에서도 언젠가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들어간다는 소망을 가지고 견뎌냈다. 뿐만아니라 광야 40년의 고통과 불편함 속에서도 가나안에 입성한다는 꿈이 있었기에 묵묵히 참으며 훈련에 임했다. 주후 70년 로마와의 유대전쟁에서 패하고 전세계를 유랑하면서도 언젠가는 하나님이 주신 가나안 땅에 자기들의 나라를 세운다는 희망을 가지고 살기도 했다. 이것은 가나안을 축복의 땅이라고 믿었던 결과이다.
  다른 한편, 가나안은 저주받은 땅이라는 사상도 구약성서에 나타나고 있다. 가나안이 저주의 땅이라는 것은 다음의 두가지 이야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 먼저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이야기”에 드러나고 있다. 오경문서설에 의하면 이 이야기는 기원전 10세기인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태동된 문서라고 한다. 특히 솔로몬 시대에는 가나안의 타락한 문화와 종교로 인해 극심한 혼란을 겪던 시대였다. 따라서 J기자는 가나안이 저주받은 땅이라는 것을 알리고 추종세력에 대한 경고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런 연유로 등장한 것이 가인과 아벨의 제사이야기이다.
  동물로 희생제사를 드렸던 아벨의 제사는 열납하신 반면, 곡식으로 드렸던 가인의 제사는 거부하셨다(창4:5). 물론 창세기는 그 이유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가나안에 대한 거부의 뜻이 숨어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원래 유목민인 반면에 가나안은 농경문화를 이루며 살았다. 그런데 가인의 곡식제사는 가나안의 농경문화를 상징하고 있다. 출애굽한 백성들이 가나안에 정착한 다음, 농경생활을 하면서 바알을 섬겼다고 한다. 이유는 바알이 농경신이기 때문에 농사를 잘 지으려면 바알을 섬겨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이런 믿음은 솔로몬 시대에까지 계속되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가나안의 농경문화와 우상종교를 거부하시는 하나님의 의도가 가인의 제사거부로 표출되었다고 할 수 있다.
  가나안이 저주받은 땅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함의 넷째 아들 “가나안의 저주이야기”(창9:25)이다. 사실 죄는 아버지 함이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저주는 그의 넷째 아들인 가나안이 받았다. 이것은 성서 독자들이 의아해 하는 부분이나 관심있게 읽으면 그 해답을 발견할 수 있다. 즉 함의 아들 가나안이 정착한 곳이 바로 가나안 땅이다(창10:19). 저주받았던 가나안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가나안 땅도 역시 저주받은 곳이라는 설명이다. 그러므로 저주받은 땅에 살고 있는 저주받은 사람들의 종교나 문화, 그들의 생활방식을 추종해서는 안된다는 메시지가 두 이야기에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가나안 땅을 “축복의 땅으로 믿을 것인가? 아니면 저주의 땅으로 믿을 것인가?”의 문제이다. 분명한 것은 어느 땅이든 무조건 처음부터 축복의 땅과 저주의 땅으로 영원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문제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땅이면 축복의 땅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이 없는 땅은 어디든 저주받은 땅이 될 수 있다. 즉 가나안이 “축복의 땅이냐? 아니면 저주의 땅이냐?”의 문제는 전적으로 거기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에 달려 있다.
  가나안에서 하나님을 잘 섬기면 축복의 땅이다. 반대로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긴다면 그 땅은 저주받은 땅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자리도 마찬가지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는 찬송가 495장의 가사를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