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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군사적 정복인가? 평화적 이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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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2020-02-03

55. 군사적 정복인가? 평화적 이주인가?

  구약성서의 여호수아와 사사기서는 이집트로부터 해방되어 광야 40년을 유랑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나안 정착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 주고 있다. 두 권의 책은 공통적으로 이스라엘이 출애굽해서 가나안에 들어와 정착했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이 두 권의 책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가나안에 들어와 정착하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에는 서로 다른 대답을 하고 있다. 이런 성서의 기록에 근거해서 구약신학자들은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을 세 가지의 가능성으로 조명하고 있다.
  첫째로, 군사적 정복설이다. 미국의 구약신학자인 올브라이트(Albright)를 중심으로 주창된 군사적 정복설은 여호수아서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여호수아서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은 총사령관인 여호수아 장군의 지휘 아래 12지파들이 일치단결하여 가나안 성들을 무너뜨린 전쟁승리의 결과물이다(수1-12장). 특히 여호수아 11장 23절은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은 단번에 이루어진 군사작전의 일환이었다는 것을 보도하고 있다.

        여호수아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모든 땅을 점령하고 그것을 이스라엘 지파의 
       구분을 따라 유산으로 주었다. 그때에 그 땅에는 전쟁이 그치고 사람들은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

  물론 군사정복설의 근거는 여호수아서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성서고고학의 권위자인 올브라이트는 이스라엘의 드빌, 라기스, 벧엘, 하솔 등은 모두 기원전 13세기경에 파괴되었다고 한다. 이들 지역에 대한 발굴에서 폐허흔적, 타버린 소형물건 등은 큰 재난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기원전 13세기의 출애굽과 동시대에 나타난 가나안 도시들의 파괴흔적은 분명히 군사정복설을 뒷받침한다는 것이 올브라이트의 주장이다. 따라서 여호수아서의 증언과 올브라이트를 중심으로 한 고고학의 발굴결과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은 군사정복설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둘째로, 평화적 이주설이다. 독일의 구약신학자인 알트(Alt)와 노트(Noth)를 중심으로 제안된 학설이다. 평화적 이주설의 성서적 근거는 사사기 1장이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에 관한 사사기 1장의 증언은 단번에 이루어진 군사정복설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가나안 원주민들과 더불어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여호수아서의 보도대로 이스라엘 12지파가 총동원되어 가나안 정복에 나선 것이 아니라 유다지파, 베냐민 지파,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 지파가 서로 다른 시기와 경로를 따라 가나안에 삶의 둥지를 틀고 있다. 따라서 사사기서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은 오랜 세월에 걸쳐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특히 노트는 여호수아가 팔레스타인의 중앙 산악지대에 자리잡고 점차 게릴라 작전을 써가며 원주민들과 교전을 하거나 또는 기브온 사람들을 통합시키는 등 단계적인 경로를 밟았다고 보고 있다. 올브라이트가 내세운 고고학의 발굴결과는 적어도 이 부분에서는 수용되지 않는다. 알트와 노트에 의하면 가나안 도시들의 파괴는 반드시 이스라엘에 의한 파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외부의 하비루들이나 가나안 소도시간의 전쟁으로 파괴되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셋째로, 구약신학자인 멘덴홀(Mendenhall)과 고트발트(Gottwald)가 주장한 농민봉기설이다. 농민봉기설에 의하면 가나안의 원주민들이 가나안의 봉건영주들의 억압에 신음하다가 야웨의 평등주의를 가지고 들어오는 이스라엘과 연합하여 봉기를 일으켜 영주들을 몰아내고 나라를 세웠는데, 이것이 이스라엘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농민봉기설은 막스 베버나 칼 막스의 사회계급 투쟁원리를 기원전 13세기 이스라엘 사회에 적용시킨 방법론으로 두 가지 면에서 한계성을 드러내고 있다. 하나는 성서에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위의 두 학설이 성서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면, 농민봉기설은 성서에 근거가 없는 이야기이다. 다른 하나는 배타성을 지닌 야웨종교가 어떻게 가나안에서 쉽게 동화될 수 있느냐는 의문이 있다.
  구약성서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을 공통적으로 보도하고 있으나 정착의 성격에 대해서는 여호수아서와 사사기서가 다르게 증언하고 있다. 세밀하게 성서를 읽는 독자들에게는 혼란의 요소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민중봉기설은 성서의 근거가 희박함으로 제외되지만 말이다. 그러나 여호수아서의 증언과 성서고고학의 발굴결과를 종합해 본다면 12지파가 함께 참여한 군사정복설이 더 신빙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정복을 주장하는 여호수아서와는 달리 여부스 족이 차지하고 있던 예루살렘은 다윗시대에 와서야 정복되고 있다(삼하5:6-10). 따라서 여호수아서처럼 완전정복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12지파가 공동으로 참여한 군사적인 침략으로 가나안을 정복했다는 것은 수용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