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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룻기의 새로운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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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2020-02-03

52. 룻기의 새로운 이해

  룻기의 역사적 배경은 사사시대인 기원전 1150년경이다. 가나안 땅의 기근으로 베들레헴 사람 엘리멜렉이 그의 아내 나오미와 장남 말룐, 차남 기룐을 데리고 모압으로 피난했다. 두 아들은 거기서 모압 여인인 오르바와 룻을 각각 아내로 맞이한다. 그러나 아버지와 두 아들은 모압 땅에서 일찍 죽고 말았다. 그러자 시어머니나오미는 베들레헴으로의 귀향을 결심하고 이 사실을 두 며느리에게 통보하면서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권한다. 맏며느리인 오르바는 시어머니의 설득으로 모압 땅에 남게 되는 반면, 둘째 며느리였던 룻은 시어머니의 강권에도 불구하고 베들레헴으로 시어머니와 함께 돌아온다. 
  베들레헴에 온 룻은 시어머니의 친척인 보아스라는 사람의 밭에서 이삭을 줍다가 보아스와 결혼을 하게 된다. 보아스와 룻 사이에서 오벳이 태어나고, 오벳에게서 이새가 태어나고, 이새에게서 다윗이 태어났다. 다윗의 족보를 보면 이방 여인인 룻이 다윗왕의 증조모가 되었다는 것이 성서의 기록이다. 즉 룻기는 다윗왕의 증조부가 이방 여인과 결혼했으나 그 후손이 크게 축복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룻기는 시어머니를 정성스럽게 섬기는 효성스러운 며느리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져 왔다. 그러나 구약신학계에서 룻기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제기되면서 흥미있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룻기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위해서는 이스라엘의 포로후기인 에스라-느헤미야의 개혁정책을 짚어 보아야 한다. 즉 룻기는 에스라-느헤미야 시대에 태동된 저항문학이라는 것이다.
  룻기가 왜 저항문학일까? 느헤미야는 페르시아의 아닥사스다 1세때 왕궁에서 임금에게 술을 따르는 관직에 있다가 기원전 5세기 말에 유대 총독으로 임명을 받아 부임하였다. 느헤미야와 함께 개혁에 정진했던 에스라는 그보다 약간 후인 아닥사스다 2세때 활동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먼저 부임했던 느헤미야는 이스라엘의 참담한 현실을 목도하고 개혁작업을 서두른다. 안식일에 평일처럼 장사하는 것을 막기 위해 예루살렘의 성문을 온 종일 닫아 두도록 했다. 그러나 느헤미야 개혁의 핵심은 이방인과의 결혼문제였다. 느헤미야는 이방인과 결혼한 자들을 저주하며 구타하고 턱수염을 쥐어 뜯으며 이혼할 것을 맹세케 했다. 물론 느헤미야의 개혁정책에 순응해서 이혼한 사람들도 있으나 그 중에는 저항한 사람들도 있었다.
  느헤미야의 이혼정책에 반기를 들고 저항한 자들이 누구일까? 룻기를 기록한 익명의 저자, 혹은 무리들은 느헤미야의 이혼정책에 반항했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반항했던 자들은 다윗의 조상인 보아스와 룻의 결혼이야기를 근거로 느헤미야를 압박했다. 느헤미야가 이스라엘의 회복지연과 고통의 원인을 이방인과의 결혼에 두고 이혼을 명령하자, 일단의 무리들이 다윗의 증조부도 이방 여인 룻과 결혼했으나 다윗이라는 훌륭한 인물이 나왔다는 것을 제시하면서 반기를 들고 있다. 즉 느헤미야가 이스라엘의 고통의 원인을 이방 여인과의 결혼에 두고 있는데 비해, 반대파들은 다윗의 조상인 보아스와 이방 여인인 룻이 결혼했으나 큰 축복을 받았다는 것을 제시함으로 느헤미야의 정책에 반항하며 항거하고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룻기는 느헤미야와 반대자들의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책이다.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룻기는 사사시대의 작품이 아니라 포로후기인 기원전 5세기 말에서 4세기 초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방인들과 결혼했어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고, 또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가 룻기에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