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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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2020-02-03
44.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다면? 현대 국가의 모든 재판은 “증거주의”를 원칙으로 한다. 즉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다면 무죄가 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고대 근동국가들이나 이스라엘에서 이러한 경우에 어떻게 했을까? 특히 자신의 아내가 간음을 한 것 같은데 증거를 포착하지 못한 경우가 직접적으로 여기에 해당된다. 물론 요한복음 8장의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자처럼 뚜렷한 물증이 있다면 문제는 간단하다. 그러나 의심은 가는데 현장을 목격하지 못하고 증거도 없을 경우에는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다. 사실 이런 경우의 해결방법은 그 성격에 있어서 약간 다르긴하나 고대 근동세계에도 있고, 이스라엘에도 있다. 우선 고대 근동세계의 해결방법을 보자. 바벨론이나 앗시리아 등 근동의 국가들에서는 간음에 대한 의심은 가면서도 증거를 포착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그 여인을 깊은 바다에 던졌다. 던져진 여자가 헤엄을 쳐서 살아나오지 못하고 익사하면 간음한 죄로 인해 바다의 신이 노하여 그녀를 벌하였다고 믿었다. 그러나 깊은 바다에 던져진 여인이 헤엄을 쳐서 살아나오면 바다의 신이 무죄를 선고한 것이라 하여 그녀를 사면해 주었다. 이러한 방법에는 많은 변수가 있다. 즉 기후가 사납고 태풍이라도 불어서 바다에 풍랑이 일어난다면 아무리 수영을 잘하는 여자라고 하더라도 헤엄쳐서 살아나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반면 바람이 없고 바다도 잔잔한 날이라면 평범한 수영실력을 갖춘 여인의 경우에도 살아날 수 있는 확률은 높은 편이다. 이런 판결법은 유프라테스 강이나 티그리스 강변의 누지와 갈그미스 등에서 성행한 방법이었다. 과학주의에 빠진 현대인들의 시각에서 본다면 참으로 원시적인 방법이고 수긍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고대인들은 이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였다. 아뭏튼 수영실력을 길러 놓는 것이 고대세계의 여성들에게는 필수적이었다고 하겠다. 한편 구약성서에서는 이런 경우에 어떻게 판결했을까? 이런 경우의 판결법을 상세하게 기록한 것이 민수기 5장이다. 구약성서의 방법, 즉 이스라엘의 방법은 고대 근동과는 조금 다르다. 이스라엘에는 큰 강이나 깊은 물이 없었기 때문에 독자적인 방법을 채택하고 있다. 이스라엘에서는 어떤 남편이 자기의 아내가 간음했다고 의심이 생길 경우에 일단 아내를 제사장에게로 데리고 갔다. 그러면 제사장은 물을 담은 그릇을 준비하고 그 그릇에다 성소의 티끌을 담고, 또한 저주의 말을 적은 두루마리를 그 그릇의 물에 빤다. 그리고는 그릇의 물을 의심받는 여인에게 마시게 했다. 물을 마신 후에 여자가 소화불량이 일어난다든지 잉태하지 못하면 간음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면 돌에 맞아 죽었다. 그러나 이 물을 마신 후에도 소화가 잘되고, 정상적으로 임신하고 아이를 낳는다면 그 여인은 무죄의 선고를 받게 된다. 일단 무죄판결이 나면 아내를 의심했던 남편은 은 100세겔을 대가로 장인에게 지불해야 한다. 은 100세겔은 남자가 결혼을 위해 신부집에 지불했던 돈의 3배에 해당하는 거액이다(신22:19). 이스라엘의 제도는 평소에 위가 좋지 않아 소화불량이 있거나 불임의 여성일 경우 헤어나올 방법이 없었다. 즉 이런 여성들은 범죄의 유무를 떠나 억울하게 당할 수 밖에 없는 제도이다. 의심을 해결한다는 이런 방법에 만일 하나님의 개입이 없다면 억울한 사람은 수도 없이 나올 것이다. 다행히도 구약성서의 하나님은 억울한 사람의 양산을 막기 위해 개입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개입은 중요한 것이다. 우리의 인생도 같다. 공산주의 이론의 창시자였던 칼 막스(K. Marx)는 인간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서는 하나님을 추방시키고 매사에 하나님의 개입을 막아야 한다고 했다. 그의 말대로 하나님의 개입을 막고 인간세상에서 하나님을 추방시킨다면 인간이 만든 부정확한 제도로 인해 양산되는 억울한 사람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현대인들의 눈에는 상당히 황당하고 원시적인 제도로 보이는 이런 판결법이 이스라엘에서 시행되었음에도 우리가 우려하는 억울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개입하셨기 때문이다. 인류의 지상낙원을 꿈꾸게 할 만큼 화려했던 공산주의 이론도 하나님을 추방시키고 개입을 막았기 때문에 역사의 쓰레기통에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는 원시적이고 불완전하게 보이는 이런 제도도 하나님께서 친히 개입하시니까 잘 적용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는 인생, 하나님이 계시는 가정, 하나님이 계시는 일터를 만들어 가자. 그것이 복받는 삶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