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아프리카 흑인, 그들은 저주받은 백성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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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2019-11-11
11. 아프리카 흑인, 그들은 저주받은 백성인가? 창세기 9장에는 홍수심판 이후의 상황이 나타나 있다. 홍수에서 구원받은 노아가 술에 만취해 벌거벗고 누워 자는 추태를 그의 아들인 함이 보고 형제들에게 고했다. 그러자 셈과 야벳이 옷을 가지고 뒷걸음쳐 들어가 아버지의 벌거벗은 수치를 가렸다고 한다. 술에서 깬 노아가 이 사실을 알고 셈과 야벳은 축복하지만 함의 행동에 대해서는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될 것이라”는 무서운 저주를 내린다. 그래서 등장한 해석이 셈은 아시아인의 조상이고, 야벳은 유럽인의 조상이고, 함은 아프리카 흑인의 조상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어릴 때 교회학교에서 이런 해석을 접하면서 자랐다. 그래서 흑인들의 고통은 성서적으로도 합당하다는 것이다. 한술 더 떠서 성서의 예언이 성취되었다며 감격(?)하기까지 한다. 그러면 과연 함은 아프리카 흑인의 조상으로써 백인의 노예가 된 것이 성서적으로 합당한 것인가? 진정 성서의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기뻐해야 할 일인가? 성서가 전하는 함의 저주이야기는 처음부터 우리에게 의아심을 갖게 한다. 즉 잘못은 함이 했는데, 저주받은 사람은 당사자인 함이 아니라 그의 아들인 가나안이다. 함에게는 “구스와 미스라임과 붓, 그리고 가나안”(창10:6)이라는 네 아들이 있다. 그런데 이 중에서 대표성이 있는 장남이 아니라 넷째 아들인 가나안이 저주를 받고 있다. 이것은 성서독자들에게 쉽게 납득되지 않는 문제이다. 우선 저주 받은 사람은 실제로 함이 아니라 가나안이다. 그리고 가나안이 거주했던 지역은 아프리카가 아니라 팔레스타인이다(창10:19). 우리는 여기서 해석상의 오류를 두가지 발견할 수 있다. 먼저 저주 받은 사람은 당시 아프리카를 무대로 정착했던 함이 아니라 가나안이며, 다음으로 저주 받았던 가나안의 후손들이 살았던 지역은 지금의 팔레스타인이라고 성서는 명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아프리카 흑인의 노예화를 성서적인 근거로 정당성을 부여한다는 것은 상당히 왜곡된 해석이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런 이상한 해석의 등장배경이다. 한마디로 이것은 백인들의 이데올로기적인 해석이다. 백인들의 종교는 대개 기독교이다. 따라서 그들은 흑인들의 노예화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성서적인 근거를 찾아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들의 의도대로 가장 잘 각색할 수 있는 말씀으로 본문의 이야기가 선택된 것이다. 백인들의 이러한 해석이 아무런 비판없이 한국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아무런 이익관계도 없는 우리가 결과적으로 백인들에게 동조해서 흑인들을 고통의 수렁으로 몰아 넣고 있는 공범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지금이라도 한국교회는 올바른 해석을 찾아야 한다. 그러면 저주 이야기의 진짜 의미는 무엇인가? 오경문서설에 의하면 가나안의 저주이야기는 야웨문서에 속한다. 야웨문서가 태동한 기원전 10세기는 솔로몬의 말기로 이스라엘 전역에 우상화 물결이 넘실거렸던시기이다. 이러한 종교적인 상황에서 야웨기자는 저주 받은 가나안의 종교와 그들의 삶을 추종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호소하기 위한 의도를 가지고 본문을 기록한 것이다. 즉 야웨 백성임을 포기하고 가나안화되어가는 백성들을 돌이키기 위해 함의 넷째 아들 가나안을 등장시켰던 것이다. 다분히 정치적인 의도성을 가지고 기록된 말씀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백인들은 이런 배경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구미에 맞게 억지로 해석한 것이다. 신학적인 반성과 함께 흑인들을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를 가지고 고통스럽게 하지 말아야 한다.